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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칼럼] 비핵화 ‘당사자 역할’ 강화할 때다

한겨레 로고 한겨레 2019.04.24. 16:40 김지석
© 제공: The Hankyoreh

김지석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어느 정권보다 경제를 대외정책 수단으로 많이 활용한다. 지경학(geoeconomics) 중심주의다. 냉전 끝 무렵에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앞으로 정책 입안자 사이에서 지경학적 고려가 결국 고전적인 지정학(geopolitics)을 대체할 것’이라고 한 예언이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트럼프 정부의 지경학 중심주의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안보 강경론의 연장선에서 경제를 무기로 삼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쿠바·니카라과 등 중남미 3개국과 이란에 대한 강도 높은 경제제재가 바로 그렇다. 미국은 이란산 원유 수입 8개국에 대한 ‘한시적 제재 유예’ 조처를 새달 2일 끝낸다고 발표해, 2위 수입국인 우리나라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다른 하나는 일자리 확보 등 미국의 단기 직접 이익을 앞세운 중상주의 성격의 경제 압박이다. 중국을 비롯해 지구촌의 거의 모든 주요국과 벌이는 통상전쟁이 이에 해당한다. 이 또한 일방적으로 상대 행동을 바꾸려 한다는 점에서 경제제재와 다를 바 없다.

북한에 대한 제재는 앞쪽 흐름에 속하지만, 목표에서 차이가 있다. 미국은 이란에 대해 핵·미사일 관련 의혹 해소는 물론이고 대외정책 전반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중남미 3개국을 ‘폭정의 트로이카’로 규정한다. 사실상 이들 나라의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비핵화가 핵심이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도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 그 밖의 대량파괴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을 문제로 삼는다.

지경학 중심주의는 그것만으로는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다. 국제사회가 행동을 함께하지 않으면 실효성이 떨어진다. 장기화할 경우 미국 자신도 피해를 보고 지도력이 손상된다. 2차대전 이후, 효과를 본 경제제재의 지속기간은 평균 53개월에 그쳤다. 제재는 또한 대상국의 국민을 결집시켜, 응징하려는 집권층의 권력을 오히려 강화하기가 쉽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적이나 경쟁국보다 오히려 변화에 취약한 우방국이나 동맹국에 대한 경제 압박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난다.

북한은 미국과의 2차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끝난 이후 긴 소모전에 대비하고 있다. 자력갱생이라는 총노선에 맞춰 내부 정비와 중국·러시아와의 관계 재설정이 시도된다. 25일 열리는 북-러 정상회담과 5~6월쯤으로 예상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이 한고비다. 북한으로선 눈에 띄는 제재 완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나라와 발을 맞추고 연대·협력할 수 있다면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자력갱생의 토대를 넓힐 수 있다. 이는 “적대세력들의 제재 해제 문제 따위에는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겠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최근 발언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갖고 다가오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몇 해 동안은 버틸 수 있는 체력을 비축하려는 게 북한의 의도다.

제재는 만능이 아니며, 자력갱생은 고통스러운 길이다. 1990년대 초반 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북한이 최근 1년처럼 분명하게 핵 포기 뜻을 내보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미국은 인정해야 한다. 적절한 방법론을 찾지 못해, 또는 최소한의 신뢰 확보에 필요한 인내심이 부족해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40억~70억달러의 통치자금을 물려받았으나 계속되는 제재로 5억~10억달러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통치자금이 말라서 김 위원장이 굴복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북한과 미국의 태도를 모두 바꿀 수 있는 우리 정부의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실마리는 북한도 주장하는 ‘한국의 당사자 역할’ 강화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까지 자임한 촉진자 역할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확장하는 것이다. 미국과 북한 사이 큰 틈이 확인된 지금 상황에서 이런 방식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미국과 북한의 태도를 상수로 놓고 북-미 협상이 모든 것을 좌우하도록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중심을 잡고 사태 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교착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비핵화 방안을 만들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존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조합해, 북한과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러시아 등 모든 관련국과의 관계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갈등이 생기더라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각오와 의지는 필수다.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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