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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얻는 선재길 걸으며 새해 설계해 볼까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세계일보 로고 세계일보 2021.01.02. 02:00 최현태

시름은 비우고 희망은 채운다 / 천년고찰 월정사의 구도자의 길 ‘선재길’ / 뽀드득 뽀드득 걸으며 우울한 2020 날려···새해엔 밝은 날이 펼쳐질거야

  선재길 © 제공: 세계일보 선재길

수백년 된 전나무가 하늘마저 가린 울창한 숲. 길도 나뭇가지도 온통 순백의 눈으로 덮였다. 그리고 마주 선 연인들.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내가 계속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너와 같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여자.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김신)가 김고은(은탁)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수채화 같던 풍경은 가슴 깊이 각인돼 눈이 수북하게 쌓이는 겨울만 되면 연인들을 숲으로 이끈다. 월정사 가는 전나무숲길에 올해도 어김없이 하얀 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금강교에서 본 월정사 전나무숲길 © 제공: 세계일보 금강교에서 본 월정사 전나무숲길 월정사 금강교와 용소 © 제공: 세계일보 월정사 금강교와 용소

#겨울이라 더 아름다운 월정사 전나무숲길

 

강원도 평창 월정사로 가는 전나무숲길에 섰다.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와 잎들이 서로 부대끼며 마치 겨울바다에 선 듯 파도처럼 “쏴아” 하고 파열음을 낸다. 바람이 지나면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는 청아하다. 눈을 감고 들으면 세상 모든 근심은 어느새 사라진다.

 

드라마 덕분이기도 하지만 천년고찰 월정사는 팔각구층석탑보다 전나무숲길과 상원사 가는 선재길이 더 유명하다. 특히 겨울 내내 눈꽃이 운치 있게 내려앉는 요즘이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선사한다. 전나무숲길은 일주문에서 월정사 금강교까지 1km 남짓 이어진다. 최고 수령 300년이 넘는 전나무 1700여그루가 오솔길 양옆을 채우고 길과 계곡이 하얀 눈으로 빈틈없이 채색된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다. 드라마처럼 폭설은 아니어서 다소 아쉽지만 겨울 낭만을 즐기는 데 모자람이 없다.

  월정사 전나무숲길 계곡 © 제공: 세계일보 월정사 전나무숲길 계곡 월정사 전나무숲길 계곡 © 제공: 세계일보 월정사 전나무숲길 계곡

전나무숲길을 제대로 느끼려면 넉넉하게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주차장에서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금강교를 건너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전나무숲길이 시작된다. 보통 이 길을 따라 일주문까지 간 뒤 해탈교를 건너 반대쪽 계곡 산책길을 따라 다시 금강교로 돌아오는 코스를 많이 선택한다.

 

피톤치드를 폐속 깊이 저장하며 걷다 보니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난다. 많은 이들이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 설국으로 변한 계곡의 얼음 위에서 사진을 찍으며 모처럼 평화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다. 하얀 눈과 얼음 위로 바위들이 조금씩 머리를 내민 계곡 풍경은 마치 솜씨 좋은 조각가가 만든 예술작품 같다. 얼음과 바위에 부딪히며 계곡에 퍼지는 물소리는 겨울에도 “시원하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로 상쾌하다. 매우 미끄럽다. 얇은 얼음이 푹 꺼지면서 낭패를 볼 수 있으니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더라도 조심하도록. 등산화나 트래킹화가 필수다.

  할아버지 전나무 © 제공: 세계일보 할아버지 전나무 할아버지 전나무 © 제공: 세계일보 할아버지 전나무

눈과 얼음을 한참 즐기다 다시 전나무숲길로 들어섰다. 광릉 국립수목원, 내소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으로 꼽히는 월정사 전나무숲에서 유명한 터줏대감이 ‘할아버지 전나무’다. 숲길 중간쯤에서 만나는데 몸통이 두동강이 나 일부는 계곡 쪽으로 누웠고 커다란 아래쪽 몸통은 빈속을 드러냈지만 아직 같은 자리에 버티고 있다. 2006년 10월 23일 밤 쓰러지기 전까지 수령 약 600년으로 숲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이었다. 나무는 수명이 다한 뒤에도 사람들에게 멋진 포토존을 남겼다. 가운데에 럭비공 모양으로 구멍이 뻥 뚫렸고 어른 3명이 들어갈 정도로 넉넉한 공간을 만들어 나무 속으로 들어가면 전나무숲길과 계곡을 배경으로 멋진 인생샷을 얻을 수 있다.

  월정사 전나무숲길 © 제공: 세계일보 월정사 전나무숲길 월정사 해탈교 전나무숲길 계곡 풍경 © 제공: 세계일보 월정사 해탈교 전나무숲길 계곡 풍경

성황각을 지나 일주문까지 왼쪽으로 휘어지는 길이 도깨비 촬영지. 길의 곡선이 아름다워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연인들이 서서 마주 보면 드라마 주인공 따라잡기가 가능할 것 같다. 전나무숲길 숨은 비경 하나 소개한다. 일주문으로 나가기 전 왼쪽 언덕 숲길로 들어서면 나타난다. 인적이 전혀 없고 숲이 아주 울창해 정말 도깨비라도 나올 것 같다. 이곳에 통째로 쓰러진 커다란 전나무 한그루를 따라 아주 길게 눈꽃이 피었다. 앉아도 보고 걸어도 보면서 나만의 시간을 가져본다. 일주문을 나서면 해탈교가 계곡의 반대쪽 산책길로 안내한다. 도깨비에서 공유가 김고은 뒤를 몰래 따라 걷던 곳이다. 다리 위에 서면 전나무숲과 계곡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산책로 중간에는 나무데크를 뚫고 솟은 연리지 나무를 만난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 제공: 세계일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 © 제공: 세계일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

#지혜 얻는 선재길 걸으며 새해 설계해 볼까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는데 적광전 앞 팔각구층석탑만 살아남아 국보가 됐다. 우리나라에 남은 유일한 고려시대 다각다층탑으로 마치 연꽃이 갓 피어오른 듯한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바람이 불자 처음 들어보는 청아한 종소리가 산사에 울려 퍼지며 마음의 때를 씻는다. 석탑 각 층 귀퉁이마다 달린 80개의 작은 청동 풍경 덕분. 탑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공양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은 석조보살좌상의 매력적인 미소도 인상적이다. 금강교 아래 용소는 겨울여행의 운치를 더한다. 가을이면 금강교와 불타는 오대산 단풍이 데칼코마니처럼 담기는 곳인데 눈으로 덮인 풍경도 단풍 못지않다. 이곳에 살던 용이 뛰쳐나와 석탑으로 변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선재길 © 제공: 세계일보 선재길 선재길 © 제공: 세계일보 선재길

월정사를 뒤로하고 선재길로 들어서자 “뽀드득 뽀드득” 하며 눈 밟는 소리가 동심을 부른다. 산이 높아 해가 빨리 떨어지는 탓에 겨울 내내 온통 눈밭이 계속된다. 상원사로 이어지는 선재길은 9km로 오대천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도로가 뚫리기 전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스님들은 이 길을 오가며 수행했다. ‘선재’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동자의 이름. 문수보살의 지혜와 깨달음을 찾아다니던 젊은 구도자가 걸은 길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선재는 착한 사람이란 뜻도 지녔다. 길을 걸으며 세상의 고뇌와 시름을 풀어 버리고 서로에게 착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방법을 배우는 길이다. 고즈넉한 겨울풍경에 푹 빠지며 걷는다. 2021년에는 어떤 시간들이 내 앞에 펼쳐질까. 선재동자처럼 구도자는 아니지만 새해를 마음속에 그리며 사색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치유되고 복잡하던 머릿속도 정리되는 기분이다. 전체 구간은 부지런히 걸어도 3시간은 걸리는데 지난여름 많은 비로 일부 교량이 유실되면서 지난 9월부터 일주문∼동피골 6.4km 구간만 개방하고 있다.

  상원사 석가모니불 © 제공: 세계일보 상원사 석가모니불 상원사 동종 © 제공: 세계일보 상원사 동종

#황태덕장에 명태가 맛있게 익어가네

 

상원사 가는 도로는 비포장길이다. 9km 정도로 20분 정도 걸리는데 상원사에서 길이 끝나기에 다시 돌아 나와야 한다. 월정사 말사인 상원사는 규모가 작고 고즈넉하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을 이곳에서 만나는데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상원사를 지나면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까지 오를 수 있다. 가는 길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등장하고 200m 앞에는 적멸보궁을 지키는 중대 사자암도 등장한다. 오대산을 상징하는 5층 계단식 향각이 독특하다.

  황태덕장마을 © 제공: 세계일보 황태덕장마을

요즘 평창은 황태가 맛있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평창까지 갔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황태전문 식당을 포기하는 대신 횡계리 대관령 황태덕장마을로 향한다. 눈 덮인 겨울산 비탈의 황태덕장에는 명태가 주렁주렁 달린 채 오현명의 유명한 가곡 ‘명태’ 가사마냥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라가 돼서’ 꾸덕꾸덕 익어가는 중이다. 명태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생선이 있을까. 신선할 땐 생태, 얼리면 동태, 반쯤 말리면 코다리, 바짝 말린 북어 등등. 명태는 대관령 자락에서 북풍한설을 견디며 120일가량 건조돼야 비로소 노란 속살을 품은 황태로 거듭난다. 탕, 구이, 찜 어떤 방식으로 조리하던 겨울 입맛을 살리는 데 최고다. 황태를 좀 샀다. 당분간 ‘집콕’을 계속해야 하는 처지니 밤늦게 시를 쓰다가 짝짝 찢어 술안주로 삼으리라. 

 

평창=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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