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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러, 중동·아프리카 팽창 가속화

한겨레 로고 한겨레 2019.11.06. 19:16 조일준
© 제공: The Hankyoreh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러시아의 세력 팽창이 심상치 않다. 2014년 우크라이나령 크림 반도를 전격 합병해 흑해를 장악한 데 이어, 지중해 패권 경쟁에 적극 뛰어들면서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까지 넘보고 있다. 러시아가 터키와의 우호 협력에 부쩍 공을 들이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터키는 흑해에서 지중해로 넘어가는 좁은 길목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관문인 보스포로스 해협을 끼고 있다. 서방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심 회원국이기도 하다.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중동에 깊숙이 발을 담근 러시아가 최근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내전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는 5일 트리폴리 현지발 뉴스에서, 지난 6주 사이 러시아가 숙련된 저격수들을 포함한 약 200명의 용병과 전투기, 미사일, 정밀유도폭탄 등 첨단 무기들을 리비아에 투입해 중동과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키우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현지 의료진을 인용해, 최근 트리폴리 남부에선 손가락 길이만 한 총탄이 머리와 가슴을 관통하지 않고 박힌 채 즉사한 주검들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무차별 포격이나 공습으로 주검이 크게 훼손됐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리비아 쪽 전투원들은 몸의 피격 부위에 총알이 들어간 구멍은 있지만 좀처럼 관통상을 남기지 않는 것은 러시아 용병들이 사용하는 저격용 탄환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리비아는 2011년 ‘아랍의 봄’으로 내전이 벌어져 42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축출된 뒤 제헌의회와 국민통합정부를 구성했으나, 2014년 총선에서 패배한 이슬람 무장세력이 선거에 불복하고 따로 정부를 세우면서 제2차 내전이 발발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는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 군벌이자 군 장성 출신인 칼리파 하프타르(75)가 이끄는 리비아국민군을 배후에서 간접 지원해왔다. 반면 유엔과 대다수 서방 국가들은 적어도 공식적으론 2015년 유엔이 리비아 서부에 있는 수도 트리폴리에 세운 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

러시아 용병의 리비아 내전 개입은 시리아 내전 상황과 여러 가지로 닮았다. 우선, 리비아에 투입된 저격수들은 시리아 내전에도 관여했던 러시아의 민간 용병업체 와그너 그룹 소속이라는 게 복수의 리비아 고위 관료와 서방 외교가의 분석이다.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 모두 경쟁 관계인 지역 토호 세력이 지역민들을 동원한 권력투쟁인 것도 같다. 그뿐 아니라, 양쪽 모두 미국과 손잡고 이슬람국가(IS)와 맞섰던 무장세력이 정작 이슬람국가의 패퇴 이후 미국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울분을 토한다. 유엔의 평화중재 노력이 실패한 것도 똑같다.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 정파·종파·민족 갈등이 복잡하게 얽힌 분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슬며시 발을 빼는 빈자리를 러시아가 치고 들어오는 모양새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서 바샤르 아사드 독재 정권을 지원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한 데 이어, 리비아의 방대한 석유자원과 지중해에 접한 약 480㎞길이의 해안선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경제적 실리가 클 뿐 아니라, 우호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터키, 발언권을 확보한 시리아에 이어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 교두보를 마련해 지중해 패권과 아프리카 대륙까지 넘본다는 전략이다.

유엔 리비아 특사인 가산 살라메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외세가 리비아의 라이벌 군벌들에 대한 무장 지원을 중단한다면 리비아인들은 차이와 분열을 봉합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치 꺼지지 않는 불처럼 영원히 저강도 분쟁이 지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이 분쟁 지역의 갈등 해결을 자국의 전략적 이익보다 앞세운 적은 한번도 없다. 특히 중동은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엄청난 석유자원 때문에 세계 패권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지역이다. 시리아 내전 이후 중동에서 러시아의 존재감이 어느 나라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진 것에 세계의 촉각이 쏠리는 이유다. 미국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유진 루머 러시아·유라시아 프로그램 국장은 지난주 미국 외교·안보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실은 기고에서, “러시아가 중동의 주요 세력으로 재등장한 것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어정쩡한 태도와 대조된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러시아가 냉전 종식 이후 4반세기 동안이나 이 지역에 없었다는 점에 비춰서도 도드라진다”고 짚었다. 중동 지역에서 러시아의 ‘복귀’가 아니라 ‘부재’가 되레 비정상적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러시아는 1980년대 후반 옛소련의 몰락과 냉전 종식 이전까지 수 세기 동안 중동과 지중해권에서 주요 세력이었다. 지중해 진출을 놓고 터키, 영국, 프랑스 등과 전쟁도 치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에트연방 시절엔 이스라엘에 맞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지원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이후 1973년까지 네 차례나 맞붙은 중동 전쟁에서 소련제 전투기와 무기를 사용하고 소련의 군사 자문을 받았다. 소련은 이집트 나일강의 아스완댐 건설에도 자금과 기술을 지원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어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중동에서 러시아의 존재감도 급속히 지워졌다. 그뒤 4반세기 동안 중동은 사실상 미국과 서방의 독무대였으나, 2015년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판도가 다시 바뀌고 있다. 유진 루머는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서방이 중동패권을 장악한) ‘옛 정상’을 ‘새로운 정상’으로 바꾸려 한다”고 했다.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에서 퇴출 위기에 몰렸던 바샤르 아사드 독재정권을 지원한 것도 중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고 미국에 한 방 먹이는 기회로 활용하는 양수겸장으로 풀이된다. “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느냐는 게 루머의 분석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실현하는 방식은 군사 개입의 자제와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운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로 요약된다. 반대로, 러시아는 적극적인 무력 개입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러시아가 주요 분쟁지역에서 군사적 수단으로 전리품을 챙긴 뒤, 다시 ‘평화의 중재자’로 변신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러시아의 재림이 미국의 퇴장을 의미하는 것도 전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유진 루머는 “미국과 러시아가 자국의 이익이 양립하거나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모색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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